19 Oct, 2016 - 03 Dec, 2016
투명한 거품들의 모나돌로지, 혹은
‘세계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곽영빈
미술평론가/영화학 박사
구동희의 신작 영상이 관객에게 남기는 ‘당혹감’에서 허심탄회하게 출발해보자.
물론 그의 이전 작품들이 종종 그렇듯, 이 당혹스러움은 ‘복잡함’보다는 ‘단순함’, ‘불투명함’보다는 ‘투명함’에
가까워 보이는 이미지의 ‘표면’에서 온다. 카메라는 허름한 동네 맥주집에서 TV를 켜고 안주를 만드는 요리사와, 실재와 가상의 뽁뽁이를 터뜨리며
카운터에서 시간을 보내는 여주인(?), 실내 자쿠지에서 모래시계를 거푸 뒤집으며 거품 목욕을 하는 젊은
여성을 교차하며 보여주는데, 누군가가 뻥튀기를 흩뿌리는 바닥이 중간 중간 끼어든다.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영상미나 감각적인 편집은커녕, 최소한의 수수께끼나
서사적 긴장도 없이 이어지던 영상은, 뻥튀기 위를 부유하는 몇몇 거품과 함께 맥없이 끝난다.
물론 소위 ‘해석’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숨을 참고 불투명한 목욕물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여성의 얼굴은, 호프집
손님들의 테이블에 튀김으로 서빙되기 전 유유자적 유영했을 새우들의 수중, 보다 엄격하게 말하면 ‘유(油)중촬영’(이어야할) 이미지와 겹쳐지고, 카운터의 여주인이 터뜨리는 뽁뽁이는 현실과 스마트폰
속의 가상앱을 진동한다. 이건 ‘장자의 호접몽(胡蝶夢)’과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얘기 아닌가?! 하지만 2016년은, 그런 게으른 독해에 감탄할 만큼 호락호락한 해가 아니다.
그렇게 허무해 보이는 자명한 이미지들의 연쇄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계열들(series)을 따라 기술돼야 한다. 그때 호프집의 ‘뻥튀기’와 ‘맥주 거품’, 자쿠지의 ‘비누 거품’, 그리고 ‘뽁뽁이’는 하나 같이 구(sphere)나 비누방울(bubble), 혹은 거품(foam)처럼, 얇고 둥근 막(membrane)을 경계로 두 가지 이상의 공간이 (불)투명하게 이접하는 이미지들의 변주, 혹은 ‘농담(濃淡)의 (비)정규분포’를 이룬다. 즉
여기서 문제는 ‘현실’과 ‘가상’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 혹은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가로지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모호한 경계다.
‘사실’과 ‘뻥’ 사이를 진동하며, ‘마이홈피’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 담벼락으로 이어지는 ‘공적인 일기장’(?!)의 계보와, 전통적으로 ‘공론장(public sphere)’의 역할을 수행했던 ‘언론매체’와 삼투되며 이와 점점 구분 불가능 할 정도로 중첩되는 (‘거대한 사적공간’인) ‘단톡방’들의 기이한 위상은, 목욕하던 여성이 욕조 안에서 골라 먹으며 가지고 놀던 주황색 뻥튀기가 색채의 차이, 즉 고도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보통의 베이지색 뻥튀기들과 쉽게 식별되는 것처럼 명확하지 않다. 냉동고 속에 보관되던 돼지고기와 새우는 튀김옷을 경계로 ‘돈카츠’나 ‘새우튀김’과 얇게 구분될 뿐이고, 비누거품 속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성은 새우들과 겹쳐지는 듯하지만 후자가 유영(游泳/油泳)하는 곳이 물인지 기름인지는 식별하기 쉽지 않으며, 여성이 물 밖으로 고개를 들 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남성이 도대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분명치 않다. 욕조라는 사적공간에서 ‘알몸’으로 목욕하는 여성과 중첩되던 새우가 남성 손님들의 ‘안주’로 올려지는 지점은, 자쿠지와 호프집 양쪽에 장착된 모니터가 일종의 인터페이스(interface)로서
서로 교차하거나 엇갈리는 것에 정확하게 연동한다.
결정적인 지점은 영상 막바지, 목욕을 하던 여성이 자신이 쓰고 있던 밝은 보라색의 구슬들이 들어간 안대를 벗을 때 등장하는데- 포스터 이미지는 정확하게 이 직전의 ‘경계/문지방 공간(liminal space)’에 해당한다-, 카메라는 이때 처음으로
호프집이라는 거대한 거품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 ‘전이(transition),’ 즉 하나의 거품에서 다른 거품으로 이동하는 시점쇼트(POV)가
‘뽁뽁이’, 즉 거품들의 평면으로 덮여있고, 이를 떼버리는
사람이 영상 내내 ‘뽁뽁이’를 터뜨리던 카운터의 아주머니라는 것(만)이
아니라(거품이 터질 때 공간과 세계의 인식은 재편된다), 그
거품이미지를 벗겨낸 이후의 시점쇼트 역시- ‘공론장’을 대체한 ‘단톡방’(들)처럼- 일종의 거대한
‘거품쇼트’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볼 때 영상 마지막에서 등장하는 뻥튀기와 비누방울은 밀도의
차이만 있을 뿐 동일한 차원에 속하는 두 가지 상태인데, 이는 구동희의 이전 작품인
다시 말해 문제는 ‘가상과 실재가 구분불가능하다’(보드리야르)거나 ‘투명성’의 전체주의에 맞서 ‘불투명성’의 사적공간을
복원해야 한다(한병철)는 따위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 다른 크기의 거품들이, 그 안이 서로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소통이 가능할 거라는 환상 속에 ‘따로 또 같이’ 갇혀 있는- 멀게는 라이프니츠가
‘모나돌로지’에서 제기했고, 건축가 톰 메인이 ‘연결된 소외(connected
isolation)’라 불렀으며, 슬로터다이크가 그의 구(球) 삼부작에서 철학사적으로 천착한 뒤, 마커스 가브리엘 같은 신성이
‘왜 (단일한)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도발적으로 반문한- 바로크적 난관을 ‘돌파’할 수 있느냐이다.
이런 엄격한 의미에서, 한 식물 개체의 꽃가루를 다른 식물 개체의 암술머리에 붙이는 것을 가리키는 이화수분/타가수분(Cross-Pollination)이라는 전시/영상의 제목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번역되어야만 할 것이다: ‘세계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사진, 조각, 설치, 영상 등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선보이는 구동희 작가는 2012년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한 주목받고 있는 작가이다. 한국, 독일, 미국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프랑스, 호주, 일본 등 여러 국가를 넘나들며 다수의 단체전에도 참여하였다. 1998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2000년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조소과 석사를 졸업한 작가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