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Apr, 2011 - 07 Jun, 2011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은 어떤 특정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것을 다루는 것에 대해 배우고, 혹은 배우지 않더라도 다양한 감각기관들에 의해 자연스레 인지하게 된다. 감각기관에 의한 정보는 지극히 주관적이므로 이러한 정보들은 개인이 느끼는 정도에 따라 상대적인 차이로 나열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물리, 물질계를 인식하게 되고,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매일 같이 스케일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스케일에 대한 인식은 감각기관에 의해 1차적으로 인식하는 방법과 이를 수리적으로 정리하여 직접 보지 않더라도 이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수리적으로 정리하는 방법은 물체마다 상대적인 크기를 갖고, 이를 정리하면 물체 크기의 특성들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각각의 차원들에 대한 스케일은 사다리처럼 한 단계, 한 단계 그 기준을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우리는 크기나 시간에 대한 스케일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정리한 스케일은 작게는 원자보다 작은 것부터, 크게는 천체 단위보다 더 큰 극한의 범위까지 포함할 수 있다.
허명욱은 프랑스와 미국 등지 벼룩시장에서 구해 모은 약 400여 대의 미니카를 촬영한 뒤 사진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덧입혀 새로운 느낌을 표현하였다. 그는 축소 비율이 적당하면서도 디테일이 살아 있어 작업하기 좋은 제품을 선택하여 사진을 통해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스케일(Scale)의 문제는 우리에게 주요한 화두를 제공한다.
왜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 아름다워지고, 어떤 것들은 추해지는가. 어떤 물건은 시간이 흘러 애틋한 것이 되고, 어떤 것은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되는가. 왜 대량생산된 일상용품들 중 어떤 것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또 어떤 것은 수집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는 장인이 만들어낸 ‘작품’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물건을 우리가 소유하거나 버리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허명욱의 카메라는 우리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바로 그런 질문들을 겨누고 있다.
II. 존재감과 물성을 가진 사물
허명욱은 제품 사진가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금속공예 작품이나 반사가 심한 제품을 주로 작업하는 테크니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허명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사진가들과 달리 사진을 찍고 프린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진 이미지가 완전한 형태의 ‘사물’이 되는 데까지 섬세한 눈과 손으로 개입한다. 이 과정에서 장난감 자동차가 지닌 디테일의 감각은 극도로 확대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며, 우리는 사물이 살아 온 시공간을 좀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 방식은 일반적인 사진가들보다는,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나 공예가들의 그것과 닮아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피사체가 주는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 자체로도 완결된 물성을 지닌 사물이 되기를 바란다.
III. 사물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
허명욱이 찍은 것은 트렁크나 오래된 장난감 자동차가 아니다. 그 위에 슬어 있는 ‘녹’이다. 장난감 자동차와 트렁크에게 시간은 ‘녹’의 형태로 내려앉는다. 시간에
마모된 사물들은 처음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와는 어딘가 조금 다른 존재가 된다. 허명욱은 오래되고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카메라를 통해 자동차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을 날카롭게 잡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무언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꾼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은
독특하다. 그의 카메라는 사물과, 그리고 거기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과 깊게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늙어가듯이, 각각의 사물들은 전부 다른 방식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허명욱은 알고 있다. 그가 찍은 어떤 사물에 슬어 있는 녹은 마치 수풀에 내리는 비처럼 생겼고, 어떤
것은 말라붙고 벗겨진 나무껍질처럼 보인다. 대량생산된 산업생산품이 지니는 기능적인 미학은, 시간과의 화학 반응을 통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는
허명욱의 작업을 통해 시간을 버텨낸 사물이 새롭게 지니게 된 아름다움과 물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허명욱의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어쩌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루는 그의 기술은 직업적인 버릇일지도 모른다. 제품 사진가의 눈은
일반인 뿐 아니라 다른 사진가의 눈과도 전혀 다르게 진화되어 있다. 그들은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 하나를
촬영할 때, 그것이 어떻게 놓여야지 아름다운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해내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아마 그의 눈과 카메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면, 낡은 트렁크는
그냥 낡은 트렁크에 불과했을 것이고, 장난감 자동차는 오래된 장난감 자동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이렇게 묵직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물건들이었는지 몰랐을 것이고, 그들의 몸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이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허명욱의 작업물은 아름답고 독특하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사진이라는 ‘물건’이 지닌 완성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는 과연 그 아름다움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아름다움의 성격이, 과연 지금-여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허명욱의 사진은 한편으로는 매혹적이고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이는 우리의 삶이 그의 사진보다 대개 남루하고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사진을 찍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삶이 충분히 아름답고 만족스럽다면 굳이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을 소유하려고 할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허명욱의 사진에 매혹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허명욱은 한때는 대량생산된 일상용품에
지나지 않던 사물이 지니게 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의 작업 안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서사는 복잡하고, 내재된 욕망은 다양하다. 아마도 그는 예술이라는
영역을 지나면서 수많은 질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질문에 대답하며 조금씩 전진할수록, 우리는 그를 통해 사물의 다양하고 복잡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