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Mar, 2013 - 05 May, 2013
봄(Vision)의 나르시시즘(Narcissism)
박제성 작가는 지난 해 갤러리정미소의
개인전과 연장선상으로 ‘박제성의 몬드리안’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데 좀 더 극적으로 빗겨나간 액자 프레임과 패턴 구성은 박제성과 몬드리안의 관계 맺기의 시각적 몰입도를 높여주고 있다. 추상회화의 창시자인 몬드리안은 일생 동안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추구했다. 완벽하다 못해 병적인 수준으로 보여지는 강박은 어찌 보면 박제성 작업의 강박과 그리고 현대인들의 수많은 종류의
강박과도 닮아있다. 몬드리안의 작품들을 정면에서 벗어난 곳에 서서 바라보고 촬영을 통해 그 관계 맺음을
기록하는 과정은 그의 가치를 허무하게 무너뜨리고 그 결과물을 해체하고 다시 구축하기를 반복한다. 몬드리안이라는
견고한 논리의 해체를 통해 또 다른 구축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작가의 프로세스는 그 역시도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부질없는 강박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은 어쩌면 서로의 강박이 서로를 비우고 치유하는 의식(ritual)이자
수행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일곱 개의 모니터 속에 영어 스펠링이 끊임없이
플레이 되고 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의 저서 『논리철학논고』을 구성하고 있는 일곱 개의 장(chapter)을 한 글자씩 촬영해서 그 의미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을 탐구하여 세계와 사고의 한계를 해명하였는데, 그의 한 글자 한
글자는 표현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목적 그 자체이자 진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그 글자들을 이용해
뜻 없는 소리들을 표현한다. 언어는 소리를 표현하고 있지만 신(神)과 진리를 완벽히 대면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진 수단에 머무른다. 이것은 언어와 그를 통한 개념이 세상의 구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주인을 세상으로 환원시키는 작가의 강박적인
의식(ritual)이다.
우리가 좇고 있는 가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박제성 작가는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가치들을 해체하고 작가
사진의 개입을 통해 익숙한 상황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그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좇고 있는 가치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내 주위에 당연하게
생각되며 흐르는 의식들과, 상황들, 개념들을 ‘의식’(ritual)하게 하는 것이 박제성 작가가 끊임없이 천착하고
있는 작업 프로세스이자 메시지다.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알고 있는 것, 읽는
것, 듣는 것, 행위 하는 것… 아니 그렇다고 믿는 그 모든
것들의 주체는 누구인가? 나인가? 온전히 나인가? 경험과 교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나는 나와 사회, 나와 역사의
경계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가 좇고 있는 가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사회와 역사에 의해서 교육되고 규정된 것. 아무런 의심조차 없이
그 가치를 위해 허공 위에 성을 쌓고 있는 강박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작가노트 발췌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였고, 영국 왕립 예술대학에서 Communication Art & Design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갤러리 정미소(서울), HADA contemporary(런던) 등에서 3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Korean eye(사치갤러리, 런던)’, ‘4482(Oxo 타워, 런던)’, ‘세상만큼 작은, 나만큼 큰(갤러리현대, 서울)’, ‘기호 그 이상(아트스페이스 휴, 파주)’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