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Oct, 2013 - 17 Nov, 2013
나는 바람이 좋다
바람이 불면 정지되어 있던 풍경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나는 바람이 좋다
바람은 자신의 모습이 없다
사물의 사이사이를 스스로 움직이며
휘돌아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바람이다.
채워진 것들, 사물을
움직이는 힘.
긴 여백, 빈 공간 그가 바로 바람이다. / 김은주
오랫동안 연필이라는 하나의 재료로 집요하게
작업해온 김은주는 늘 화면에 드러나는 이미지 자체를 뛰어넘는 에너지와 삶을 화폭에 노출한다. 그녀의
업에서 흑과 백의 대비가 단조로움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필의 검은색이 빛에 의해 분산되고 반사되면서 작업에 다채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종이와 흑연의 마찰이 일으키는 질감을 만들기 위해 반복적으로
연필을 움직였던 정직한 노동력이 이미지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폭의 두께를 생성하기
어려운 연필로 도달한 도상의 깊이와 탄탄한 구도는 가벼운 드로잉 재료로 인식되는 연필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작가는
1990년대 초기부터 프레임 속에 갇혀 꿈틀대는, 거친 필치의 인체와 얼굴 드로잉으로 억압과
욕망을 연상시키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2000년대 초 발표했던 길이
20미터, 높이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인체군상은
작가와 재료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초기작품 중 하나이다. 인체군상 시리즈에서 단순화된 인간 형상들은
화면의 사각틀(프레임)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밀치며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는데, 이 큰 규모의 검은 몸부림들은 관객에게
강한 인상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000년대 중반 작가의 소재는 오랫동안 천착했던 인체작업에서부터
파도로 옮겨가게 된다. 파도는 아버지에 대한 가슴 아린 기억과 바다 곁에서 성장한 그의 환경 덕택에
자연스럽게 포착한 소재이다. 파도 형상 또한 4-5미터에서 20미터 길이에 달하는 규모로 제작되었는데, 대규모 인체작업에서 보이던
이미지보다 오히려 그녀의 필치가 지닌 생생한 힘을 더욱 잘 드러내는 시리즈이다. 간결한 검은 파도에서
전해지는 시적 상상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흑연의 파편은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관객들을 엄습한다.
이번에 출품되는 식물 형상 시리즈는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작가 스스로 인체, 파도, 식물과 같은 소재의 변화는 이미지의 변화일 뿐이라고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 획 한 획을 그어가는 과정과 집요한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소재의 변화는 그리 큰 의미일 수 는 없다. 달리 말해 그녀가 제시하는 이미지는 형상으로 고착되기보다 꿈틀대며 무한히 증식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뜻한다. 아니, 에너지의 절제와 통제, 여백과 이미지의 분명한 구분, 그리고 빈 공간과의 관계는 작가의 삶이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늘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야 할 터이다. 요컨데 작가는 대상을 대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생명의 에너지를 한 올 한 올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그의 작업을 마주한다면 존재의 의미와 행위의 과정을, 관객 자신의 삶을 길어 올리며 바라보아야만 할 것이다. / 김성연
1990년 부산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울, 동경, 홍콩 등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작가의 작업은 아트웍 보다는 작업자체에 있다. 다양한 브랜드의 외국산 4B연필로 수많게 겹쳐져 그린 꽃잎은 작업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