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Mar, 2014 - 28 May, 2014
멜랑콜리의 체계들을 위한 심승욱의 더블플레이
고원석/ 베이징
아트미아재단 예술감독
수년전
서울의 어느 미술관에서 열린 단체전에서 처음 본 심승욱의 작품은 묘한 느낌이었다. 이상한 형태의 덩어리에서
발산되는 뭔가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을 감지하면서 작품 주변을 서성거렸었다. 일정하게 흘러내린 검은
글루들이 촘촘히 매달려있는 기이한 형태의 덩어리가 허공에 매달려있는 모습은 넓은 전시장의 한 부분을 생경한 분위기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천천히 뜯어보니 그 기묘한 느낌은 일견 무거워뵈는 덩어리가 의외로 가벼운 자세로 매달려있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불안감, 혹은 불편함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외형과
무게, 즉 감각과 인식의 관습적 알고리듬에서 슬쩍 비켜서있는 것이었다.
비평의
일반적 시각, 즉 형식과 의미라는 요소를 중심으로 심승욱을 작품을 바라보면 상반된 속성을 가진 두 요소가
하나의 입체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검은 중력. 심승욱이 작품 제목으로 조어한 이 단어는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 가장 주요한 두 가지 요소를 형용사와 명사의
형식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서로 공유할 수 없는 토대로 인해 상호 조화할 수 없는 두 요소를
인위적으로 결함시킴으로써 일정한 대립과 긴장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전적 조각 재료의
전형성을 한참 벗어난 글루라는 재료를 써서 작품을 만든 것은 심승욱이 젊은 조각가로서 기왕에 존재하는 창작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재료를 조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작가적 의지를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 열이 가해져 일정하게 흘러내린 글루는 재료의
특별한 물성에 시간이라는 비물질적 요소가 더해진 것으로 조각의 재료로는 매우 가벼운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을 이용해 완성된 작품은 고전적 재료가 그러하듯 조각이 가진 본질적인 무게와 단단함,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특유의 아우라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상반된 속성으로 기존의 재료가 가진 전형성을 일정하게
가장(假裝)하는
이중성이야말로 그 작품들이 가진 특별함이다. 재료를 중심으로 한 더블플레이를 통해 심승욱은 무거움과
가벼움, 거부감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역설의 모멘텀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노력이 성취한 것은 작품의 형태가 가진 특별한 매력이다. 무거움과 가벼움, 단단함과 무른 성질이 공존하는 이 작품들은 통상 시각이 대상의 형태를 파악하는 고전적인 경로에 교란을 가하고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보려고 노력하면 잘 안보이는 이 작품들은 오히려
그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를 접어 두었을 때 실체가 드러나는 역설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검은 중력 연작이 보여주는 일정한 한계도 있었다. 그것은 작품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그 이중성을 극점까지
밀어부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작품이 일정한 오브제로 이해되는 오류를 야기했다. 일정한 형태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축조해나간 행위가 의식적 동질성을 갖는 형태로 귀결된 것이다. 그래서 작품이 스스로 보는 이의 ‘형태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이어서 제작한 구축과 해체(Construction & De-constriction) 연작은 좀
달랐다. 구축과 해체 연작에서는 형식적인 동질성이 더 철저히 부정되었다. 형태의 측면으로 보자면 작품들간의 유사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
이 작품들을 언뜻 보면 눈에 띄는 검은색과 파괴된 형태 등으로 인해 전보다 강해진 동질성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검은색을 비롯하여 심승욱의 아이콘처럼 되어버린 몇 가지 특징들이 반복된 것처럼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검은색을 특정 색이 아니라 여하한 색에 대한 거부, 그리고
빛에 대한 부정으로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 색은 사실 ‘검은색’이라기 보다는‘어두움’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므로
색상의 반복은 사실 작품의 구성에 있어서 동질성을 논의할만한 필연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
게다가
이 작품들은 재료의 동질성 또한 거부하고 있다.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서 하나의 작품 안에 배열시키는
그의 행위를 통해 파괴된 가구의 파편, 버려진 장난감, 혹은
부러진 나무 등 소멸을 기다리는 다양한 폐기물들이 작품의 재료가 되었으므로 이를 특정한 재료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들에서 형태는 더욱 철저히 부정되었고, 작가가 처음부터 추구했던,
‘의도치않은 형태의 구축’의 본질에 더 다가간 느낌이다. 아마도 이번 전시의 제목인 ‘Object A’는 그러한 의미를 기저에 두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 온 역설적 이중성이 훨씬 강렬하게 드러났다. 또한 검은 중력 연작들이
공중에 매달리거나 벽에 붙어있는 방법으로 구현되었던 것에 비해 이 작품들은 스스로 구조를 가지고 지면위에 서 있는 프리스탠딩(free-standing)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더 강렬한 아우라를
발산한다. 결과적으로 색과 빛을 제거하고, 재료를 거부하며, 형식을 거부한 작가의 노력은 더 강한 색감과 물성, 그리고 더 단단한
형식의 완성이라는 역설로 귀결된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레고 모형을 이용한 작품들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원래 레고라는
형식이 갖는 특징은 일정한 단위들을 조합하여 어떤 형식을 축조하는 것에 있다. 재료가 의도하는 축조의
과정에서 시작하여 다시 그것을 조각적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재현하여 조합시킨 이 작품들은 구축과 해체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다시 프리스탠딩하는 작업이 가진 몇가지 특징들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재료는 분명하게 인지가능한 것이고, 형식은 파괴 이후 다시 재조립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유지해 온 이중성을 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작가 스스로 자신의 전작들에
대한 의심을 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새롭게 시도한 사진 작품들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이 보인다. 사진이 보편적으로 기록하는 대상의 존재성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드러낸 그의
사진은 기록의 대상에 대한 의심과 부정, 그리고 그렇게 부정된 개념을 기록하기 위해 다시 대상을 선택한다는
이중 부정의 모순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승욱이 이러한 이중성의 분열상황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내가 본 심승욱은 그러한 개념적
이중성을 처음부터 의식하며 작업하는 체질의 작가가 못된다. 오히려 재료를 앞에 두고 부지런히 신체를
부리고 결과를 궁금해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긍정과 근면의 미덕을 가진 사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이 갖고 있는 이 모순의 불편함과 이중성은 그의 태도가 의도하는 것이기보다는 그의
내면이 무의식적으로 지시하는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심승욱에게서는
주류 질서에 대한 체질적 불편함이 감지된다. 작가 스스로도 고백하듯 그의 내면에는 성공이라는 목표에의
집념과 그 성공이라는 대상에 대한 강한 회의가 공존한다. 전자는 작가의 신체적 체질에 가깝고 후자는
작가가 몸담은 이 세계와의 관계 설정을 통해 후천적으로 얻게 된 심리적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나아가
예술의 숭고함에 대한 찬탄과 경외를 견지하나 동시에 고급 예술이 갖고 있는 허세와 기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이러한 대조적 속성을 화해시키기엔 각각의 입장이 가진 질량과 밀도가 너무 강하다. 이 양립 불가능한 상황의 공존은 결국 어느 한 편의 상실을 예고한다. 이
상실의 불안감이야말로 두려운 대상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일종의 우울증을 야기하게 된다.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우울증의 원인은 대개 상실의 두려움으로 인한 상처, 혹은 증오다. 자아가 타자가 되고 다시 타자가 자아가 되며 애증이
교차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심승욱은 스스로 빠져 있는 모순의 상황을 정리하거나 정제하지 않고 스스로를 파괴시키고 소멸시키는 방법을 취한다.
상실을 두려워한나머지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출현하는 슬픔과 공허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죽음 이전의 장엄함을 넘어선 죽음 이후의 장엄함이며 불가능한 꿈의
세계의 외재적 형태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자이자 기호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죽음에 저항하는
승화[1]’는
바로 이런 형태의 미학적 구현을 언급하는 개념일 것이다. 멜랑콜리의 세계들이 통합된 기호의 체계들로
구현된 것의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크리스테바를 통해 본다면 심승욱이 만들어내는 이 검은 중력의 세계를 ‘이 세상에 실현된 저승’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재현도 아니고 완벽하게 새로운 세상의 창조도 아니다. 해서 그가 구현하는 세계에서 일정한 질서를 모색하려는 노력은 큰 의미가 없으며, 동시에 새로운 천지 창조의 영력을 갈구하는 것도 부질없다. 오히려
그러한 보편적 토대 자체를 부정하고, 시각의 근본적 구속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구축과 해체가, 분리와 결합이, 흥분과 냉소가, 동조와
반역이 하나의 풍경에 공존하는 세계가 보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우울증은 모두에게 존재하는 필연적
병리이기 때문이다.
[1] 줄리아 크리스테바著, 김인환譯, <검은 태양> (동문선, 2004) p.128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학사, 동대학원 조각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14년 사치 & 프루덴셜 아이 어워즈 조각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작가이다.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온 ‘구축과 해체’는 검은색 합성수지를 이용해 구축과 해체 사이의 모호한 지점을 포착한 형태로, 인간의 모든 행위들이 결국 욕망에서부터 생겨난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