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Oct, 2014 - 30 Nov, 2014
갤러리로얄의 이번 개인전에서는 허명욱 작가의 ‘문(gate)’ 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작업을 선보입니다. 그는 2011년 갤러리 로얄에서 “Scale” 이라는 주제로 세월의 흔적으로 상처를 입은 장난감 차, 낡아지고 부서진 트렁크 등을 소재로 한 작업들을 선보였습니다. 최근 작업에서는 진주에서 유년기 시절을 보낸 작가의 고향에 대한 기억과 함께 전통문양을 간직한 문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작업을 통해 오랜 시간과 인생에 대해 사유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허명욱-사라짐의 배후를 응시하는 사진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허명욱은
낡거나 녹이 슨 문들을 수집했다. 시간 속에서 불가피하게 겪은 무수한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문의 표면은
그 위에 머물렀던 시간의 양과 강도에 따라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사물도 나이를 먹는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사물의 죽음이다. 사라지는 사물의 끝은 어딘지
멜랑콜리하다. 사라짐은 존재가 겪는 독특한 사건으로 사물과 존재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사라짐으로서, 그 종말로 인해 사물은 비로소 휴식과 평안을 얻는다. 녹이 슨 문이나 페인트칠이 조금씩 벗겨진, 그래서 문득 맨 살을
보여주는 문을 보고 있으면 사물들의 끝과 소멸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현재의 삶 속으로 설핏 죽음의 그림자가 들이닥치고 현실계를 이루는 완강한 사물들의 배후가 유령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생명으로 충만한 현재의 삶이 깨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속적인 시선이 거두어지는 것이다. 비로소 사물의 현상적 측면이 아니라 그 이면, 즉 사물의 본질을
보는 시선에 접근하게 된다. 모든 실재의 확고한 본질은 결국 공허다.
존재했던 것들은 사라진다. 인간은 그 사라짐을 응시하고 그에 대해 사유하는 존재다. 그 역시 사라지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본다. 왜? “사라짐은 우리 없는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장
보드리야르) 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유는 ‘공백에까지 이를 수 있는 사유’(라캉)이듯이 진정한 응시는 세계의 외관 너머의 공백과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소멸되어 가는 문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물론 우리는 문의 피부를 본다. 모든 이미지는 불가피하게 존재의
외관만을 제시한다. 그러나 진정한 작가들은 그 외피 너머를 보여주는 이들이다. 작가는 시간의 입김에 의해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문의 외관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사물의 본질인 공허를 본다. 죽음과 폐허의 미를 발견했다. 그 매혹적인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사진으로
봉인한 후 그 위에 부분적으로 페인팅을 하고 다시 이를 재촬영해서 제시한다. 그것은 소멸되어가는 사물을
영원한 시간 안으로 수렴해 환생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일종의 의식에 해당한다. 죽어가는 사물
자체를 더없이 매혹적인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위장, 화장술이다. 여기서
사진과 회화적 개입은 다분히 주술적이고 연금술적이다. 이를 통해 낡은 사물은 기묘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시간의 경과로 인해 본래의 상태에서 무척 많이 변질된 녹슨 문짝이나 창틀은 그 자체로 완벽한 미적 대상이 되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어떤 흔적, 사건들이 상형문자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말을 건넨다. 눈과 마음을 자극하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문은 스스로 자기 삶을 고백한다. 자신이
겪었던 지난 시간의 흔적에 대해 발설한다. 모든 피부는 대책 없는 토로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표면은 시간에 의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순간을 증거하고 있다. 시간은 그렇게 존재의 피부 위에 다소 잔인하게 서식한다.
허명욱이 다시 보여주는 문은 회화와 사진이 궁극적으로
공략하고자 했던 실재감, 환영을 충족시킨다. 동시에 문이란
오브제(레디메이드)를 그대로 절취한 듯 한 느낌도 든다. 아울러 우리들 삶의 주변에서 이미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미적으로, 혹은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거나 현실에 대한 반응의 침전물로 받아들여 다루고 있다. 수 십 년 동안 그는 오래된
물건, 이른바 빈티지 사물들을 수집했다. 뛰어난 디자인, 섬세한 세공, 그리고 절묘한 색채의 조화로 가득 한 사물들이다. 그것은 충분한 미술품이기도 하다. 대부분 일상에서 쓰이는 물건들이고
실용적 차원에서 만들어져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마모되고 닳은 것들이다. 생활의 연장들인데 특히 금속성의
도구들이 많다. 그는 금속에 대한 독특한 기호를 간직하고 있다. 그에게
금속으로 이루어진 사물은 견고함, 매끄러운 물성,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녹이 스는 것을 허용하고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피부, 그 피부가 자아내는 형언하기
어려운 색채를 지닌 존재이다. 불가사의한 모종의 미적 감각을 견인해 내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에게 금속으로 이루어진 모든 사물들은 매혹적인 기호, 다시
말해 마음의 능력들을 활동시키는 기호가 되어 다가온다. 기호란 ‘세계 안에서 우리가 사유하게끔 강요하는
어떤 것이다.’
그의 작업은 전적으로 수집의 산물이고 결과다. 그가 발견하고 수집한 문 이미지는 오랜 시간의 결, 주름을 두르고
있는 표면으로 이루어졌다. 평면의 문들은 마치 추상회화의 화면과 동일하게 펼쳐져 있다. 물감의 다채로운 표정을 지닌 촉각성의 화면처럼 문들은 한결같이 페인트 칠이 벗겨지고 떨어져나간 흔적, 녹이 슬고 희미해진 자취로 가득하다. 그것은 시간이 만든 ‘추상적’
흔적이다. 시간에 의해 마모되고 형해 화된 사물, 피부들이
회화가 되었다. 더러 실물 크기로 확대되어 실제처럼 자리한다. 순간
오브제작업이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과의 쓰라린 마찰을 겪어내고 난 후에 생겨난 아름다움과 물성을 작가는
수집해 설치한 것이다. 그에게 오래된 문짝의 피부는 자신을 끌어당기거나 상처를 주는 어떤 세부(풍툼, 「punctum」)가 되었다. 자신을 찌르던 그 피부를 촬영한 사진을 캔버스 천에 프린트
한 다시 부분적으로 물감을 입혀서 회화적인 가공, 개입을 한다. 그
다음에 이를 또 다시 촬영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위에 다시 질감과 표면 효과를 고려한 회화적 공정이
마지막으로 얹혀져서 완성된다. 그것은 실재를 촬영한 사진이미지도, 그렇다고
그림으로 재현한 것도 아닌, 그 둘이 혼성된 이상한 이미지다. 사진의
과잉이지 회화의 과잉이다. 두 영역 모두에서 과잉된 이미지가 감각적으로, 선명하고 깨끗한 화상도로 진입한다. 그것은 광고사진의 선명함과 유사하다. 이 과도한 선명함은 그 자체가 새로운 미감의 원천이 된다. 그것은
육안으로 보던 현실, 대상과 분명 다르다. 어딘지 초현실적인
느낌, 언캐니 한 뉘앙스가 있다.
포토리얼리즘에서 포토리얼리스트들은 사진의 필름을
캔버스 위에 투사하거나 사진에 촘촘한 그리드를 쳐서 캔버스 위로 정교하게 옮긴다. 그들은 원작과 복제의
관계를 전복시킴으로써 사진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상을 증언한다. 반면 허명욱은 존재하는 것을 다시
존재하게 하는 게 아니라, 즉 재현하는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다시 존재하게 하는 편이다. 아니 더 극단적으로, 감각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편에 가깝다. 그는 대상을 왜곡하거나 변형하거나 상상력을 동원해 다시 만들지는 않는다. 여전히
실재에 충실하다. 그러나 그는 사진에 머물지 않고 그 표면을 조금 더 밀고 나간다. 사진이란 기계적 이미지, 디지털이미지에 손 작업이란 아날로그 방식이
개입하고 그 둘이 한 표면에서 동거하고 들러붙는다. 따라서 그 피부는 여러 층위의 재현, 가공의 두께를 두르고 있다. 이처럼 그는 사진적 지각과 회화적 지각을
섞는다. 그러자 이 사진은 시각성과 함께 기이한 촉각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회화는 견고한 금속성의 사물, 오브제로
다가온다. 이것은 사진과 그림 사이를 떠돈다. 분명히 친숙하고
낯익은 것이지만 어딘지 새롭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의 사진은 분명 특정 사물, 대상의 기록적 사진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달아난다. 그것은 또한
혼성적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맨 처음 촬영한 시간, 그리고
회화적 보정을 거쳐 다시 찍은 시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최종적 시간이 겹쳐있다. 허명욱의 작업은 사진만도 아니고 그림만도 아니다. 이 둘이 결합해서
이룬 이미지다. 기술적 코드로 그리는 사진은 기술적 형상으로 이는 분명 회화적 형상과는 다르다. 다른 두 개를 하나로 만든 형상이다. 이것 역시 실재를 허구화 하는
일종의 전략에 속한다.
내 앞에 오래된 문이 서 있다. 시간의 결로 가득한 문, 창틀이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생채기가 되어 그 피부를 채우고 있다. 그곳에는 시간과 바람, 빗물과 사람의 흔적, 그리고 이런저런 힘, 다른 사물들과의 마찰과 압력에 의해 긁혀지고 스러진 자취를 다소 참혹하게 발설하고 있다. 주어진 사물에서 회화를 발견하고 기이한 폐허의 아름다움, 죽음의 미학을 관음 한다. 사물 너머의 죽음의 자리를 본 것이다. 그 죽음의 미학은 산 자들만이 느끼는 기쁨이기도 하다. 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살아서 저 죽은 시간의 잔해를 마주하고 있고 그것을 심미적으로, 감각적으로 향유한다.
19세 때 아버지께 선물 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처음 접했다는 허명욱 작가는 서울 산업대학교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지만 현재는 사진 작가로 활동 중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진 작업은 공예품의 손맛이 느껴진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갤러리스가타(도쿄), 스페이스 두루(서울), 이타미 미술관(이타미), 조은숙 아트앤라이프스타일 (서울) 등에서 총 10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