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Mar, 2015 - 26 Apr, 2015
탐욕에 관한 묵시록적 보고서
이재언 미술평론가
가공할 에너지의 작가 차경철의 근작 자료들 중 이색적인 전시 기록이 하나 있었다. 조형 철문(鐵門)전(2014. 5. 성남시 수정구 소재 주택)이 그것이다. 5개의 출입구 철문을 작품으로 만든 것으로, 대나무, 연꽃, 동백, 물고기, 액운을 물리친다는 귀면 등을 소재로 한 단금(鍛金) 작품들이다. 쓰임새라는 점에서 완벽하고, 아울러 문은 조형 작품의 매개이자 장(場)으로서 손색이 없다. 현장전시라는 것이 우리에겐 좀 낯선 일이지만, 공공조형 혹은 건축적 조형의 측면에서 적지 않은 가능성을 보여준 전시임에 틀림이 없다. 판금만의 작업이라 해도 기념비적인 규모일 터, 일일이 두들겨가면서 성형을 해나간 단금의 결정체라는 점은 대형 금속조형의 독보적 위상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작가는 이번에 동물 이미지를 소재로 한 대형 금속조각을 등장시키면서 스케일과 상상력이 압권인 설치 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알루미늄 판금과 단금으로 성형된 돼지, 코뿔소, 독수리, 거미 등의 재현적 동물상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과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금속과 유리의 융합에 의해 탄생된 ‘blooming’ 연작에서 보듯이, 구조와 물성에 충실한 추상성이 작가 고유의 양식으로 정착되는 듯했다. 하지만 철문 작업을 경유하면서 작가에게 재현적 혹은 형상적인 것은 친숙한 것이 되었으며, 상징적이거나 개념적인 문맥으로 조심스럽게 진입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자상한 설명, 혹은 빤한 문맥이 보이는 그런 친절은 선호하지 않는 것 같지만, 관람자들에게는 독해하는 묘미를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번 작업에 과거의 소리 연작에서 등장한 바 있었던 멀티셀룰러 호온(multi-cellular horn) 기능을 띤 구체와도 같은 오브제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오브제가 동물 이미지와 조합되면서 그것은 좀 더 다른 의미를 지시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물신(物神, fetish)과도 같은 대상이다. 소리가 나오는 뿔 모양의 음각은 문맥상 더 이상 소리로서의 의미적 한계를 벗어나 어떤 인간의 탐욕들이 결집되고 응축된 인공물 혹은 물신으로 해석되고 있다. 골드나 실버로 금박, 은박된 기술적(descriptive) 요소들이 바로 이러한 해석적 국면들을 보다 선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욕구의 대상이자 헛된 욕망이라는 실체, 나아가 현실세계 자체 혹은 문명 등으로까지 그 해석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체(球體) 오브제가 동물상들과 연결되고 있는 조합의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수리의 발톱에 포획되어 어디론가 날려지고 있는 모습, 혹은 코뿔소의 뿔에 찍혀 한낮 쓸모없는 그 무엇이 되고 만 상태, 그리고 거미가 배출한 가는 실에 매달려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떨어질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는 모습들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욕구해 왔던 그 물신들이 어딘지 모르게 공격당하거나 혹은 희롱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 혹은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도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모종의 보이지 않는 힘 혹은 초월적 존재에 의해 유린되고 심판받고 있는 실존적 상황이기도 하다.
참으로 강렬하면서도 통렬한 풍자성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작가는 세태 혹은 현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면서도 냉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 등장하고 있는 동물상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인간의 탐욕이 타자화(他者化)해 온 자연계이자, 유한적 존재에 대한 초월적 존재의 메신저일 수도 있다. 우리 무의식 어디엔가 도사리고 있으면서 신화나 설화에 등장하곤 했던 신비적 존재의 그 무엇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것의 실체는 언제까지나 궁극적으로 중립적이고 중성적인 것으로 묵시록적 심판의 전달자와도 같은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극적인 연출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로 동물상들이 벽이나 천장에 붙어 있는 상태에서 구체 오브제들이 달려 있거나 연결되어 있어 역동적이고도 압도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특히 거미작품 같은 경우 케이블윈치에 의해 20-30m의 아래에서 구체 오브제가 상하로 키네틱의 움직임을 연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루이스 부르즈아Louise Bourgeois의 거미 ‘Maman’과 어떻게 의미를 달리하고 있는 지를 음미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설치 시공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작품들이 갖는 중량이 최대의 관건이며, 또한 핵심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 작품의 진가가 드러난다. 보통의 모델링 조각이라면 청동이든 알루미늄이든 당연히 주조 방식이 불가피하며, 따라서 무시할 수 없는 중량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모두가 알루미늄 판금과 단금에 의해 3-5mm 가량의 두께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상상력과 표현을 위한 연출을 지탱해주고도 남는다. 예의 극적인 연출이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근거이자 단초이다. 이렇듯 연출의 성취가 가능할 수 있게 하는 기술적 토대야말로 조형디자인 범주의 특장이 아닐 수 없다. IMF 이후 주춤했던 대형 금속조형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정점에 서 있는 작가의 이번 근작은 전시장이라는 공간을 넘어 공공적 조형으로서도 신선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하나의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1989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금속공예과 졸업 1991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산업공예과 졸업 1995 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 미술대학원 금속공예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