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Oct, 2022 - 03 Dec, 2022
갤러리로얄 김지예 큐레이터
“가을 저녁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자연은 유연한 영혼을 가진 존재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심한 듯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읽는 소녀가 있다. 책을 향한 시선은 날카롭지 않지만 깊고 담담하다. 소녀는 마치 커다란 돌조각처럼 멈춰 침잠하는 듯 보이면서도 동시에 새털처럼 가볍고 편안해 보인다. 고경애의 신작 <소녀>(2022) 속 인물은 유연하고 평온한, 그리고 따듯한 “자연의 영혼에 기댄” 한 인간을 나타낸다.
고경애는 2008년 경 부터 독학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로 주로 삶의 터전과 관련 있는 인물화, 꽃과 같은 자연물을 담은 정물화, 자연 이미지 등을 다양한 색의 회화로 작업해왔다. 일본에서의 다단했던 삶의 경험들을 담은 초기작들을 비롯하여 귀국 후 가정을 꾸려 머물게 된 경기도의 한적한 터전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은 현재의 작품들까지, 한결같은 열정과 신념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고경애는 갤러리로얄에서 2016년 국내에서는 데뷔전과도 같은 첫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데, 당시 강렬한 인물화들로 뚜렷하고 개성 있는 작업 세계를 알리게 되었다. 갤러리로얄은 초기작 시기 이후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진 작가의 성장과 변화의 지점들을 살펴보기 위해 이번 전시 ‘고경애 개인전, 유영하는 삶의 조각’을 기획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머무는 삶의 터전 속 인물, 생활 속 정물, 자연 이미지 소재의 회화 20여 점을 펼쳐 보인다. 전시 제목 ‘유영하는 삶의 조각’은 고경애 작품의 중심이 되는 반추상적 형상들, 다시점, 풍부한 색의 조합 등과 연관된다. 작가의 자유로운 시각을 통해 일상 속 다양한 형상들은 단순화되고 때로는 해체되며 마음껏 화폭 안에서 부유하기도 한다.
2016년 개인전 '카미스기의 섬'에서 선보인 작품들에서는 강렬하고 독특한 인물 표현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구작에서 중심이 된 인물화는 힘 있고 뚜렷한 검은 윤곽선, 비교적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 다소 톤 다운 된 색감 등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각 인물에서 느껴지는 고뇌하는 눈빛과 몸짓의 에너지는 인간의 불안과 고통, 실존을 잘 드러내는 인물 묘사로 알려진 서양 미술 작가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작품들에 비추어 이야기되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품 군을 참고했을 때, 현재 작가의 작품들에서는 상당히 많은 표현의 변화들을 찾아볼 수 있다. 명료하고 강한 윤곽선은 유동적인 색면의 조합으로, 다소 사실적 묘사들은 반추상에 가까운 기하학적 표상으로 변화하였다. 이중에서도 유독 색의 선택이 매우 밝아진 점이 눈에 띄는 변화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변화 요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고경애 작가가 가족, 아이들이라는 소중한 존재를 갖게 된 개인적 삶의 변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상실의 아픔을 가늠하기도 어려운 어린 나이에 사고로 부모님과 이별했고, 이후 단단하게 견디며 잘 성장하였지만, 새롭게 꾸린 가정과 '가족의 존재'는 고경애 작가에게 단순한 '행복'과 '안정'이라는 표면적 단어들로도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이는 작가에게 무엇보다 특별하고 소중한 범주이자 삶의 경계가 확장되면서 풍요한 감정의 영역으로 끝없이 깊어지는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불어 작가는 여섯 해 전부터 경기도의 외진 지역인 ‘노곡리’로 거주지를 옮겨서 가족과 생활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푸른 나무와 산새들에 둘러싸여 자연과 깊이 교감하게 되었고 섬세한 자연의 이미지들에 더욱 매료되었다. 현재 고경애는 거주지 주변의 평범한 일상의 장면들, 삶의 소소한 장면들에 귀 기울여서 노곡리의 자연 풍경, 생활 속 기물들, 아이들의 작은 표정들, 농부들의 일하는 모습 등을 주요 소재로 그려낸다. 작가는 자신의 모든 작업이 자연의 형태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자연의 경이로운 변화를 통해 “유연함”에 대한 작업의 철학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연 이미지들 뿐 아니라 인물과 정물도 주요하게 다루는데, 소재는 달라도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이 주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 억지로 만들거나 없애버리지 않는 자유로움, 변화에 담담한 ‘유연함’이라는 생각이다. 초기 무게감 있는 작업들이 상실이나 고뇌, 어두움이라는 단어들로 종종 해석되었던 것에 대해 작가는 당시 “(…)사람들이 제 그림에서 어둠을 많이 보는데 깊이와 어둠은 다르거든요. 기억을 깨고 어둠에서 나와 빛으로 나가는 것이 제 숙제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묵직한 현실의 무게 속에서도 그는 어둠 그 자체보다는 깊은 성찰의 시간들을 그려냈던 것이었고, 궁극적으로 긴 성찰의 끝에서 “빛으로 나가는 숙제”를 자연이 주는 넉넉함과 유연함에서 찾아내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된다. 고경애는 추운 겨울과 비바람에도 단단히 버티는 자연물들의 강인함과 때로 계절에 따라 변화하고 담담히 소멸되는 유연함과 겸손함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찾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근작들은 대부분 밝은 색감의 조화와 대비를 고려하였고, 사실적 묘사보다는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하여 독특한 반추상적 형태들로 환원하였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형태를 기하학적 형상들로 단순화하고 다시점을 구사한다는 점은 1900년대 초 서양 현대 미술사에서 형태의 해방을 구현한 ‘큐비즘(Cubism)’적 기법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형태를 다각도로 분석하여 복합적인 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펼치기 위한 이성적, 분석적 기법이 큐비즘의 근간이라면, 고경애의 기하추상은 오히려 ‘형식 너머의 감정을 이끌기 위한 단순화’에 가까운 “자연에 기댄” 유연한 시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2013년 일본에서 접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비정형적 작품들을 접하며 색과 형태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더욱 고심하게 되었다. 베이컨 작품의 왜곡된 형상들과 강렬한 색의 조화를 통해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상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가고 삶의 경험에 대한 “풍요로운 감정”을 담기 위해 작가는 현실 속 “형태를 빌려온다”고 말한 바 있다. 대상의 형태를 캔버스에 그대로 구현하지 않고 이미지화, 재구성하여 작가만의 섬세한 느낌과 특정한 시각을 표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은 정물>(2022)과 같은 작품에서는 유리잔과 사과 등 각 정물들은 도형과 같은 형상으로 그려냈고 정물을 지지하는 기반을 분할하고 기하학 형태로 환원하였다. 배경 또한 창문 혹은 출입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도형의 형태들로 나타냄으로써, 한정된 공간이 아닌 무한하고 초월적인 시공간으로 확장될 것 같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린>(2022)에서도 유사한 맥락으로, 테이블은 마치 쏟아질 듯 한 색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치즈와 복숭아 등 음식들은 무중력상태에서 부유하듯 운동감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물화 속 평범한 일상의 소재들은 상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새로운 구조물이 된다. 정물화 뿐 아니라 인물화에서도 추상적으로 다듬어진 형상들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이목구비의 구체적 묘사는 생략되면서 인체의 비율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단순화하여 변형한다. 인물의 형상은 <옆모습>(2022)에서와 같이 배경과 조화를 이루며 크고 작은 면들로 분할되고 주로 캔버스에 가득 차게 단독으로 자리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가족이 주요 모델이지만 특정 인물의 개성이 강조되기보다는 형태의 단순화와 추상화를 통해 개인성이 흐려져 보편적 인간의 모습에 더 가깝게 나타난다. 작가는 이를 통해 평안하고 기쁨 속에 있는 동시에 깊은 내면에 닿은 사유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이렇게 작가가 ‘빌려온 형태들’은 다양한 ‘색’들로 채워진다. 색은 고경애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서 대상을 경직된 형태에 가두지 않고 유동적인 색을 구성하여 형태 너머 내면의 영역을 표상한다.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등 원색과 파스텔톤의 다채로운 채도를 지닌 색의 조각들은 화면 속에서 다소 리듬감 있게 각자의 영역을 지킨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컬러 연작’들인 <블루 아포가토>(2022)와 <레드>(2022), <그린>(2022)과 같은 작품들에서도 작가가 색을 통해 영감을 얻는 방식들을 잘 살펴볼 수 있다. 보는 이들은 각각의 색이 주는 기쁨, 희망, 치유와 같은 메시지들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바람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하나의 고정된 형상으로 그릴 수 없고, 계절과 빛의 변화를 수치화할 수 없듯이 작가의 시각은 자연의 섭리를 닮아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있기 보다는 자유롭게 유영한다. <봄 그림자>(2021) <여름 그림자>(2021)에 이어 전시에서 만나볼 수 있는 <가을 그림자>(2022)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 작가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유연한 영혼’을 의식하며 형상화할 수 없는 영적이고 감성적인 영역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한다. ‘자연 이미지 연작’에서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길이와 빛과 색의 온도,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주목한다. 여기서도 특정 자연물이나 풍경의 구체적 묘사가 아닌 몇 가지 압축적인 선과 색의 추상적 형상들로 화면을 채운다.
고경애는 인물과 정물, 자연의 모습을 주요 소재로 담아내지만 ‘풍경화’와 ‘인물화’, ‘정물화’와 같은 경직된 범주를 만들고 각각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는다. 소재는 다르지만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자연에 스며있는 유연하고도 넉넉한 영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경애의 작품 속에서 저마다의 색으로 버무려진 삶의 조각들은 궁극적으로 자연 속 ‘빛’의 스펙트럼을 닮았다. “빛은 인간의 따듯함을 닮았다”고 말하는 작가는 일상에 감각적 색을 입혀 삶의 따듯한 순간들을 전하고자 한다. 고경애의 작품 속 형상들은 무리한 집착과 탐욕, 소유에 의한 상투적 기쁨, 상실의 두려움을 안은 행복 등 우리 삶을 속박하는 틀을 털어낸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이 존재들은 한 그루 나무처럼 의연하면서도 평온하게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세월을 버틴 특별할 것 없는 작은 토기를 보면서 고경애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이 누군가의 곁을 지키며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자 생각했다고 한다. 그림을 몰랐던 그가 어느 한 미술 작품에 매료된 이래로 숱한 밤을 지새우며 작업실을 지켜온 지독할 정도로 순수하고 진지한 성찰의 시간들은 작가의 작품들에서 행복한 빛의 색깔들로 녹아있다. 삶의 다양한 이미지의 단면들로 환원된 고경애의 작품들을 통해 보는 이들은 깊은 감성의 영역으로 시각이 확장되고 작가의 자유로운 감각을 공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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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삶과 가치관을 살펴볼 수 있는 유영하는 삶의 조각 Q&A
(http://pf.kakao.com/_xkxbxdpM/96728025)
○ OPENING RECEPTION
일시 : 2022.10.6 목요일 오후 5:00시
장소 :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709 B1 갤러리로얄
○ 오프닝 예약 및 문의
① 카카오채널 1:1 채팅 (https://bit.ly/3KQSnqJ)
② 02. 514. 1248
** 전시는 무료 관람이며 별도의 예약이나 티켓 없이 입장 가능합니다.
기획 및 주관 | 갤러리로얄
후원 | 로얄앤컴퍼니
고경애는 2008년 경 부터 독학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로 주로 삶의 터전과 관련 있는 인물화, 꽃과 같은 자연물을 담은 정물화, 자연 이미지 등을 다양한 색의 회화로 작업해왔다. 일본에서의 다단했던 삶의 경험들을 담은 초기작들을 비롯하여 귀국 후 가정을 꾸려 머물게 된 경기도의 한적한 터전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은 현재의 작품들까지, 한결같은 열정과 신념으로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고경애는 갤러리로얄에서 2016년 국내에서는 데뷔전과도 같은 첫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데, 당시 강렬한 인물화들로 뚜렷하고 개성 있는 작업 세계를 알리게 되었다. 갤러리로얄은 초기작 시기 이후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진 작가의 성장과 변화의 지점들을 살펴보기 위해 이번 전시 ‘고경애 개인전, 유영하는 삶의 조각’을 기획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가 머무는 삶의 터전 속 인물, 생활 속 정물, 자연 이미지 소재의 회화 20여 점을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