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Jul, 2022 - 18 Sep, 2022
‘부루마블’은 1982년 국내의 한 회사에서 개발한
보드게임으로, 우주에서 원경으로 바라 본
지구의 모습 ‘블루 마블(Blue Marble)’로부터
따온 명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에서 먼저
출시된 모노폴리(Monopoly)의 번안판으로도
보이는 이 게임의 핵심은 토지와 건물의 투자를
통해 상대를 파산시키는 신자유주의 논리와
투기 활성화를 위한 가상 화폐 발행 등 20세기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의 축도에 있다.
40여년이 흐른 지금, 우주적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본 게임이 지닌 사회문화적 함의는 한층
짙고 풍부하다. 지나간 세기를 힘차게 견인했던
것은 전지구적 개발주의와 부동산 광풍, 항공과
통신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우주여행에 대한 열망,
문명의 영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을 포괄하는
같은 낙관적 시대정신이자 유토피아니즘의
실험과정 그 자체였다. 녹색 푸르름을 발산하는
지구의 모습은 흠결없는 단단한 구체(球體)로,
마법사의 신비한 구슬의 심상으로, 생명 자원이
넘치는 아름다운 행성으로 묘사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원거리에서 행성을 역-조망하면서
렌즈의 배율을 확대하여 거리를 좁혀 들다 보면
사람과 사람, 마을과 도시 공동체, 국가와 대륙 단위로
전이되는 갈등과 침탈, 혐오와 보복 같은 인간사의
누추함과 눅눅함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자원 채굴
단계에서부터 내재된 자연에 대한 일방적 착취와
산업혁명 이후 오랫동안 화석연료 기반으로 움직여 온
제조와 물류 시스템, 원거리 생태의 오염과 파괴를
근간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인지하게 될 때,
‘푸른 구슬’이라는 수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란
우스꽝스러움, 서글픔, 노스탤지아(Nostalgia)
그 어디쯤의 복합적 정동일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빈곤과 어둠을 몰아낸
20세기에 대한 역사화를 서둘러 마친 지금에서야
우리의 사랑스러웠던 행성을 채우던 여러 컬러의
팔레트들을 밀접한 거리에서 톺아보고,
단단해 보이던 구슬의 속성을 오래오래
투시해 볼 여유를 갖게 된다. 지구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이어진 기후 변화의 징후들과
결코 종식되지 않는 팬데믹의 창궐은 세계의
운영 체계를 일단 멈추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역설적이게도 오늘 하루를 망쳐버린 어제의 일들을,
내일 하루를 안전하게 열어 낼 오늘의 과제들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 셈이다. 단단하던 것들이
붕해되고, 안전하던 종들이 일시에 멸절하며,
약속된 세계관이 무너지는 부정적 경험 속에서
세계를 대하는 새로운 온도와 자세가 재조정 되는
그런 시간을 관통해 나가고 있다.
오늘날 평범한 이들에게 소외감과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일은 고도 과학기술과 디지털 통신,
미디어 진보가 가져다 준 ‘놀라운 신세계’의
실사화가 아니다. 끝을 기약하기 어려운 최근의
팬데믹으로 드러난 생태종으로서의 인류가 가진
근본적 취약성이야말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전지구적 위기상황 속에서 극명하게 가시화된
상호 폭력성, 당위 없는 전쟁과 테러, 순간순간
마주하는 퇴행적 세계에 대한 실망감이야말로
인류세의 종말을 입 밖으로 꺼내 보게 하는 요인이다.
실시간으로 파편화되어 중계되는 정치적 참극과
코앞까지 다가온 이상 기후, 잠들지 않는 드센 불길,
인종과 종교, 문화를 둘러싼 가짜 기제들로 끝없이
재생산해내는 혐오와 차별의 풍경.
지난 세기, 인류 공영의 낙관주의를 투영했던
푸른 행성은 이제 피, 땀, 눈물, 더위, 혐오로 가득한
붉은 행성의 모습으로 황폐화 되어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세계와 도래할 인류의
운명 앞에 ‘레드’가 아닌 ‘퍼플’의 색채를
덧입혀보고자 함은 우리가 쥐어짤 수 있는 마지막
안간힘이자, 긍정 회로의 최소치일지 모른다.
퍼플이 푸른 빛에 가까운 보라색일지, 붉은 빛에
수렴하는 자주색일지 그 경계는 모호하다.
자연에서 구하기 어려운 색인 퍼플은 오랜 동안
여러 문명권에서 고귀한 색의 상징이었고,
오늘날에는 경계를 가로지르며 다양성을 수용하는
문화적 표상을 담은 컬러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세계의 끝없는 진보와 발전을 확신하던 시기에도
차가운 시선으로 공동체의 앞날을 걱정하고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설파하던 존재들이 있었고,
모든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망실되는 순간에도
인간이 가진 끈질긴 회복성과 놀라운 실천력을 믿고
나아가는 존재들이 있었다. 그러한 교차적 시선 안에서
가장 건강한 판단을 내리는 무리 속에 우리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총 6개월에 걸쳐 1, 2부로 구성으로 마련된 전시
<퍼플마블>은 동질적 공간 내에서, 동일한
작가 그룹이 이러한 세계관의 변동과 붕괴,
회복의 순환적 연결고리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암시적으로 표명하는 자리이다. 기획 의도에 따라
인류, 생태, 행성, 우주로 확장되는
거대 사회 담론을 작가들의 특수한 발견으로 좁히고,
동시대 미술 어법 안에서의 상상의 통로를 넓게
펼쳐내고자 한다.
유토피아(Utopia)의 또 다른 일면이기도한
‘우(Ou)-토피아’는 말 그대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온갖 것들이
헤테로(Hetero)적인 상태로 병치,
존립하는 현실 세계에서 과연 순수한 이상향이나
절대적 디스토피아가 있을까? <퍼플마블>이라는
병합적 심상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오래 전
폐기된 낙관주의를 전면 부정하고, 비관적 세계상을
시각적 형태로 강화하는 데에 있지 않다.
언제나 바라왔던 ‘저 세계’를 지금 이곳에 실재하는
‘이 장소’로 변경해 나가는 실천적 상상력을
함께 여는 것에 있다. 각기 다른 매체와 주제를
변주하며 인간 세계의 유한함을 가공된 자연 풍경과
인공 물질의 면모로써 제시하는 아홉 작가들의
작업을 경유하며 존재와 세계에 대한 질문을
생성해 나가는 여정이 되었으면 한다.
공간 속에서 유영하는 추상적 환영들 사이로
각자의 어떤 ‘마블’을 추억하고, 정의하고,
식물을 주 재료로 시적인 작업을 선보여온 스튜디오 누에와 다양한 재질의 직물을 활용하여 과감한 형태의 조형을 전개해 온 파이브콤마가 협업한 <언덕 넘어>는 자연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가장 인공적인 방식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또한 자연을 가까운 대상이자 원경의 풍경으로 인지하고, 궁극적으로는 삶의 한 부분으로 통섭하여 가까이 두고자 하는 노력을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스튜디오 누에가 주로 다루는 식생인 이끼와 파이브콤마에서 사용하는 직물은 각각 자연과 인공, 원시와 문명 상태를 표상하는 대칭적 물성이자 재료다. ‘언덕’으로 명명된 구조체는 각 재료들이 공예적 손질과 직관적 해석을 거쳐 상호교직 되는데, 이를 통해 단일한 양감을 구축한다. 미디어 장비가 생성해내는 빛과 사운드, 산업적 재료로 제작된 구조물을 조망하며, 주변과 대치되면서도 동시에 감싸 안아주기도 하는 등 언덕 너머의 복합적 풍광을 일구는 데 일조한다. ‘자연적 풍경’이라는 말에 내재된 이율배반적인 특질, 즉 오직 인공적인 노력을 통해 자연 상태의 무위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순환적 고리를 상기해 보면서, 끊임없이 규범과 위계를 넘어서는 창조적 노력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사유해보게 된다.
뉴미디어 아티스트로서 공공 영역에서 정교한 3D 매핑 테크닉과 독창적인 스펙터클을 선보여 온 이석의 최근 관심사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간적인 감각과 환원 불가능한 지성에 대한 관심, 물질 문명과 디지털 기술에 대한 방법적 회의와 성찰로 수렴하고 있다. 높게 솟아오른 첨탑의 형상으로 전시장의 수직적 좌표를 점하고 있는 매트릭스 패널 구조의 전광판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행하는 경계 공간이자, 제 3의 공간을 향해 관통해 나가는 추상적 환영을 제공한다. 영상 작업의 제목이자 키보드 위의 실행 명령어이기도 한 “Enter” 와 그 주변을 감싸며 4채널로 구성된 또 다른 영상 시리즈의 표제인 “Key”가 개념적으로 쌍을 이루면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표면 너머의 깊이와 그 끝에 도달하게 될 세계의 온도를 투영해 보게 된다.
디지털 애니메이션에 사변적 서사를 개입시킨 민지연의 작업
사진을 주 매체로 작업해 온 김호성은 전통적인 촬영과 프린트, 액자 마운팅 대신 영상 프로젝션과 시트 부착, 조형물 설치와 같은 다른 재료의 실험과 가변적 설치 방식을 통해, 세계의 풍경을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뭉그러뜨리고자 한다. 자유로운 여행에 제동이 걸린 시간 동안 구글 스트리트 뷰어로 수집한 원거리의 도시 모습과 행인들의 초상은 가상적인 풍경일까, 혹은 가장 현실적인 관찰의 결과물일까.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생명력 넘치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국제도시의 원형인 뉴욕 거리의 구석구석에서 캡쳐한 컷들은 어색한 비례와 크기로 접합되어 이미지의 파편성을 극대화한다. 사진적 재현의 목적 상실과 통합성의 결여로 이루어진 설치 환경은 떠도는 이미지와 실재하는 세계, 그것들을 상호 매개해 나가는 존재와의 마주침과 어긋남을 경험하게 해준다.
김준수는 기계장치 특유의 형태와 질감, 빛과 운동성과 같은 조형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동시에 그 안에 내재된 폭력과 공격의 메커니즘, 오류와 같은 부정적 징후들을 동시에 드러낸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파고들고자 하는 지점은 기계 미학의 물리적 체현 그 자체이기 보다 인간의 감각계의 확장적 사고와 생멸 시스템의 구조적 환유를 향하고 있다. <감각의 요소>는 초기작업에서부터 여덟 번째 버전에 이르기까지 모터와 기어, 베어링과 같은 단순한 기계 메커니즘을 통해 빛의 굴절과 산란을 증폭시켜온 실험을 지속하며 고유한 서사와 공간 시학을 제시해왔다. 최근 작가는 인간과 기계 사이의 역전된 구도 속에서 바이러스와 면역 체계와 같은 최근의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대입해 보고 있다. 기술 문명에 대한 비관적 전망 속에서도 북극광처럼 신비롭게 방사되는 빛의 고리를 생성해내는 작가의 이율배반적 태도 속에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기계, 존재와 非존재 사이 피아(彼我)식별의 모호함을 공감하게 된다.
사운드 아티스트 김대희가 실천하는 소리의 수집과 생성, 연주의 방식은 다양한 위상의 존재들이 종횡으로 연결되어, 상호 공명하게 되는 우연성과 협업에 내재된 유희성 위에서 작동한다. 장기 참여 프로젝트로 선보이는 새 작업 <푸른 보라>는 그간의 작업 철학과 마찬가지로 낯선 주체들이 함께 보이지 않는 그물코를 하나 둘씩 연결해 나가듯 사운드를 생성해 나가는 열린 작업의 구조를 지속, 강화해 나간다. 빛을 구성하는 푸른 빛의 파장은 다시 고음역대의 청각 정보로 치환되며, 관람객들은 가장 인간적인 접촉의 방식을 통해 블루-라이트의 음원들을 소환하고, 쌓아 나가는 인터플레이에 참여하게 된다. 개인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재난과 위기의 순간들을 경험하면서, 그 회복과 치유 또한 개인과 개인간의 마주침과 공동체의 울림 속에서 가능함을 독자적인 사운드 인터페이스로서 암시한다.
오늘날 가장 물질적인 작업의 형태를 통해
조각의 비물질성을 둘러싼 논쟁적 사유를
촉발시키고 있는 조각가 강재원은
공기주입 방식의 대형 조각을 선보인다.
자연으로부터 채취한 전통적 재료를
빚어내고 깎아 만든 조각의 긴 역사 말미에
디지털 데이터로 미리 축조되어 시뮬레이션 되고,
원하는 재질로 출력 생산되며, 필요에 따라
가상적 세계 안에서 가상의 형질로 존재하는
가장 비근한 ‘미래적’ 조각 상태를 지향한다.
전시장 입구에 검은색 벨벳으로 마감되어
팽팽하게 서있는 거대한 인플레이터블
(Inflatable, 공기주입) 조각